창작극장

시트콤 부부의 칼로 물 베기

초하류 2004. 9. 9. 12:27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랑 이야기 하는게 그렇게 귀찮어? 내가 정말 더러워서 같은 하늘이야 어쩔수 없지만 코딱지 만한 24평 안에선 같이 숨쉬고 싶진 않다구 흥"



정신없이 쏘아 붙이고는 앞뒤 생각 없이 아파트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물론 남편은 금방 따라 나와서 에걸 복걸 하면서 나를 집으로 끌고 들어 가겠지 그리고 오늘의 이 어이없는 - 뭐 늘 어이없는 일도 다투는 우리니까 - 에피소드를 정리하고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잠속으로 빠져들면 되는거였다.



'어디까지 가 있지? 그래도 나왔으니까 엘리베이터 까지는 가 있어야 되나? 아냐 금방 문을 열고 따라 나올테니까 거기 까지 갈 필요는 없나?'



짧은 시간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휙휙 지나갔다. 그런데 몇걸음도 가기 전에 한밤중 너무 조용한 아파트 복도에서 울리는 내 슬리퍼 끄는 소리에 어깨가 저절로 움찔하자 마치 정점에 다다른 롤러코스터가 땅으로 곤두박질 치듯이 내 의식은 현실로 내 동댕이 처 졌다.



"어 왜 안나오는거야 이럴 인간이 아닌데.."



사실 나도 그다지 잘한건 없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온 사람을 붙잡고 싫다는데도 부득 부득 그날 본 드라마 스토리를 이야기 해주며 감상을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관심있어 하고 진지하게 물어 보는데 조금쯤 반응해주면 어떤가 말이다.

한다는 소리가



"드라마 작가들이 만든 갈등에까지 끼어 들고 싶지는 않어. 야 난 내 현실 문제 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버리기 직전이라구"



그렇잖아도 못되 보이는 눈매의 남편이 특유의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리는 사람 복장 터트리는 웃음을 입에 머금고 유들 유들한 목소리로 저런 대사를 하는데 열받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곤 침대에 누울때 까지 그 문제로 옥신 각신 갑론을박을 하다 결국은 나만 약이 오르고 몸이 달아서 소리를 지르고 아파트 문을 나서는 예의 실력과시로 들어 갔던 거다. 그런데 왜 벌써 나와서 나를 억지로 끌고 들어 가줘야 할 남편은 나오지 않는 걸까



시계나 핸드폰 같은 시간을 객관화 시킬 도구를 잃어 버리고 나면 시간이란건 의식의 속도로 흐르기 마련이다. 벌써 복도 저쪽끝이 뭔가 어른 어른 거리는거 같기도 하고 잠옷 바람으로 이렇게 복도에 서있다가 옆집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렇게 내 의식안에서 20분 정도로 추정되는 시간이 흐르고 나자 이제 가라 앉았던 내 감정은 다시 얇은 양은 냄비에 얹은 라면물처럼 부글 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내가 잠옷 바람으로 나온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오래까지 안나와 본단 말야? 흥 그놈에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이 걸렸다는 건데.. 내가 질줄 알구"



땅에 내 동댕이 쳐 졌던 내 의식은 다시 끝간데 없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의식 안에서 20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임계점을 간단히 넘어 버리고 말았다.



씩씩 거리며 다시 현관문 쪽으로 뛰듯이 달려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침실문을 확 열어 졎히자 나타난 어이없는 광경에 내 의식은 다시 한번 땅으로 내 동댕이 쳐 졌다.



남편은 침대 해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체 잠이 들어 있었다.



잠시 멍하게 잠든 남편을 보고 있다가 퍼뜩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현관문을 잠그고 침실로 돌아와서 한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남편을 낑낑 거리며 당겨다 눕히고 옆에 누웠다.



내일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남편에게 뭘 사달라고 협박할까 까지 생각이 미치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자니 어느세 기분이 좋와져 버렸다.



'출근 하려면 이제 자야겠지? ^^'


슬쩍 남편의 한쪽 팔을 빼서 베고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