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빨감자전거-

초하류 2004. 1. 8. 12:24
조금 일찍 퇴근한 나는 라면 박스를 하나 가지고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 어머니는 더 이상 거기 게시지 않는다. 장례식 그리고 몇 주 후에야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어머님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라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같이 모신지 15년 동안 이 조그만 21평 서민 아파트 조그만 방 하나도 채우지 못할 만큼 어머니의 짐은 단출 했다.

늦게 한글을 깨우치셨던 까닭에 자질구레한 메모지들이 가득 나왔다. 한 장 한 장 마다 어머님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라 생각하니 한 장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던 중 작고 낡은 수첩이 눈에 뛰었다. 몇 년 전 달력으로 표지를 입힌 것이었다. 생전에 당신께서 가끔씩 들고 다니시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 났다. '어머니 뭘 그렇게 열심히 적으세요' 하고 여쭈어 볼 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펄쩍 뛰시던 것 까지도.

겉장을 들추자 커다랗고 삐뚤 빼뚤한 글씨들이 수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주너셕 알사탕',

큰 소리로 웃을 때면 천사같이 사랑스럽지만 외동아들답게 유달리 고집이 황소같은 아들녀석의 떼쓰는 표정이 눈앞에 떠올랐다. 모르는 사이에 작은 미소가 내 입가에 번졌다. 어머님이 가시고 몇주동안 잃어버린 미소가 되돌아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 째 장에 떡하니 써있는

'손쥬놈 빨감 자전거'

옆집 사는 친구녀석이 샀다며 때를 쓰다 회초리에야 겨우 고집이 꺾여 그 작은 눈과 종아리가 퉁퉁 부어서야 잠이 들었던 몇 달 전 그날이 기억났다.

어머님의 몇푼 안 되는 용돈은 손주의 소원 앞에서 너무 무력하셨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자질구레한 소원들, 장난감 총, 딱지, 구슬 따위는 적힌 횟수가 한번 많아도 두세 번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빨감 자전거는 두 장 건너, 세 장 건너, 넉 장 연달아 끊이지 않고 계속 적혀 있었다.

평소에 좋지 않던 심장에 기어코 탈이 나서 병상에 누우셔서도 사람이 가만히 누워있으면 더 늘어지고 좋은 것 하나도 없다 시며 연꽃을 접으셨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10000송이를 접어가면 오만 원이나 준다며 자랑이 대단하셨다.

"오만 원 어디에 쓰실 거에요 어머니 제가 그냥 드릴께요."

아무리 말씀 드려도 막무가내셨다.

그리고 입원하신 지 두 달째 되던 날 어머님은 우리 부부가 보는 앞에서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그 편안하신 표정에서 나는 그윽한 평온함이 보이는 듯 했다. 결국 어머님께서 접으신 연꽃은 당신 가시는 가마를 장식했다. 스무 송이 모자라는 10000송이였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글씨가 흐려지더니 후두둑 수첩으로 떨어지는 눈물. 마지막 장에 까지 쓰여 있는 그 삐뚤 빼뚤한 글씨들이 내 가슴을 후벼 팔 듯이 달려들었다.

'손쥬놈 빨감 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