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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극장2004.01.19 12:25
"어 눈 오는데"

창가 자리 박대리의 들뜬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아 있던 사무실 공기를 강타 했다. 조용히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키보드만 달그락거리던 직원들도 한마디씩 거들어 사무실은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겨울에 결혼 하는 건 여러 가지로 힘든 점도 많지만 이렇게 결혼 기념일에 함박눈이라니 차가운 날씨에 야외촬영으로 손이 꽁꽁 얼어 붙은 지난 일쯤은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달콤한 추억이 되어 버린다.

봉급도 쥐꼬리지만 얼른 모아서 집을 사자는 와이프의 억척 덕분에 책정된 한달 용돈10만원 하지만 그 용돈 중에서 얼마라도 힘들게 모아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목 좀 마를때 음료수 한잔 안 마시고 피우던 담배를 끊고 주변 사람들에게 짠돌이네 소금덩어리네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 가지고 싶어서 몇 번이나 만지 작 거리다 내려 놓은 이 목걸이를 척 걸어 주면 그 사람은 애기처럼 팔딱 거리며 기뻐해 주겠지..

커피를 한잔 타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좀처럼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 보게 된다.

'오늘따라 시계가 늦장을 심하게 부리는군..'

의자를 뒤로 하고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그날 일이 고선명 HDTV 화면처럼 또렸하게 눈앞에 펼쳐 졌다.

벌써 20분째 공원 주변을 걷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별 이야기도 없이 그저 낙엽을 밟으며 걷기만 했다.

소개시켜준 친구는 얼렁 뚱땅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 버리고 말주변 모자라고 쑥맥인 나는 뭔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 시킬 요량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건만 겨우 꺼낸 한마디는 어쩜 그렇게 재미없고 멋스럽지도 못했을까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재치 있는 유머도 힘있는 카리스마도 없이 그저 공원길을 걷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마디 타박도 없이 묵묵히 내 옆에서 같이 걸어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보다 반보 정도 뒤쪽에서 다소곳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너무 걸음이 빠른가 하고 잠시 늦춰 보기도 하고 조금더 빨리 걸어 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내 반보 뒤쯤에서 따라 오고 있었다. 아담한 키에 나직 나직한 목소리 거기다 이렇게 자신을 낮출줄 아는 요조숙녀를 만나다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보다.

그날 이후 2년여의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골인해서 오늘은 감격스러운 결혼 1주년이 되는 날.. 어서 집에 가서 선물과 함께 오랜만에 와이프가 좋아하는 와인이라도 한잔 하면서 분위기라도 잡아봐야지.. 이런 게 행복이겠지?

아 참 이 사람 혹시 눈 오는 거 모르는 거 아냐? 핸드폰을 꺼내 1번을 꾸욱 힘차게 눌렀다. 딩동 연결 음과 함께 신호음이 들렸다.

"어 눈 오잖어"

오늘도 "5분만더"를 외치며 이불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남편을 깨워서 출근 시키고 대강 청소를 끝내고는 언제나처럼 인터넷으로 아파트 시세와 제테크 비법을 찾아 다니다 문득 베란다를 보니 흰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결혼 1주년 기념일에 함박눈이라.. 멋진데.. ^^'

등뒤에는 커피메이커가 고소한 원두 커피향을 내며 보글 거렸다. 머그컵에 커피를 따라 한모금 마시고 베란다 밖을 보다가 문득 그이와 첨 만난 날이 생각났다.

'오 하느님 어쩌자고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T..T'

방에 도착해서 옷을 벗을 여유도 없이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힘든 하루였으니까.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간만에 소개팅이라 조금은 기대를 하고 나왔건만 그저 그런 얼굴에 평범한 외모 거기다 말주변은 어찌나 없는지 20분 동안 한다는 소리가 겨우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그리곤 20분째 공원을 이리 저리 해 메고 걸어 다니는 게 아닌가

까페에서 일어나다 소파 모서리에 긁혀 새로 산 스타킹은 뒷무릅쪽에 오백원 짜리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치마로 가려지긴 하지만 불편하고 사람들 눈이 신경 쓰여서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혹시나 눈치 첼까 봐 보조를 맞춰서 조금 뒤쪽에서 걸으려니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아파오는 발가락의 통증은 신경 쓸 사이도 없었던 것이다.

별로 였던 첫인상 덕분인지 2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매달리는 그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떨리는 맘으로 식장에 들어선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1주년이라니..

폴폴 거리는 커피 향과 함께 과거 속에서 이리 저리 해 메고 있던 나를 현실로 잡아 내린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여보 지금 창밖 한번 봐봐 함박눈이 펑펑 내려. 오늘 저녁에 멋지게 와인이라도 한잔 하자구"
Posted by 초하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