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솔로 K씨의 영화보기

초하류 2006. 1. 12. 15:22
"나 오늘은 좀 일찍 퇴근 할께"

"뭐야 드디어 솔로 탈출 한 거야? 데이트라도 있는 거야?"

K씨는 특별한 대답 없이 그저 씽긋 웃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서른을 훌쩍 넘어서 아직도 솔로인 K씨는 유일한 취미인 영화를 보기 위해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어 버린 야근을 뒤로 하고 오늘도 사무실을 서둘러 나오는 중이다. 얼마 전 K씨가 살고 있는 외곽 아파트 근처에 들어선 멀티플렉서 덕분에 영화보기가 한결 수월해졌건만 계속되는 야근에 차일 피일 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 한가해진 오늘 저녁을 놓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철역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정해진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K씨에겐 언제나 낯선 일이다. 주머니를 부스럭거려 PDA를 꺼낸 K씨는 우선 이어폰을 귀에 꼽고 주위 사람들에게 음악이란 바리케이드로 자신을 격리 시켰다. 그리곤 초조하게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힐끔 본 PDA는 벌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8시5분에 시작인데 시간이 간당 간당 하겠는걸"

눈은 흔들리는 전철에서 조그만 PDA화면으로 읽던 소설의 뒷부분을 쫓고 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굼뜬 것 같은 전철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읽었던 줄을 자꾸만 다시 읽고 있었다. 얼핏 정거장 이름을 확인하고 남은 정거장 수에 2를 곱해서 시간을 저울질 해 본다.

"음 20분 정도 남겠군"

부랴 부랴 나오느라 저녁도 먹지 못한 K씨는 싼 가격에 영화 보는 동안 끼니를 어떻게 때울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철 문이 열리자 후다닥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뛰다시피 걸어 올라간 K씨는 극장을 올라 가기 위해 전철역과 바로 통해 있는 백화점의 문을 열었다.

"자 마감 세일입니다. 한 봉지 2천원~~"

하얀색의 높다란 모자를 쓴 점원이 쾌활한 목소리로 자신의 앞을 지나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거 하나 주세요"

2천원에 산 빵 봉지 안에는 슈크림 빵 두 개와 도넛 한 개가 들어 있었다 한끼 식사로 충분한 양이었다. 고민하던 끼니가 해결 되자 시계에 눈을 돌렸다. 아직 15분 정도가 남은 시간, 시간은 충분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0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매표소 앞을 구불 구불하게 막아 놓은 선을 따라 많이도 줄을 서 있었고 8시 5분전에 과연 표를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만도 했다. 게다가 매표소 위의 커다란 전광판에는 8시 5분 영화 제목 옆에 매진이라는 빨간 글자가 깜빡 거리고 있지만 K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혼자 영화 보러 오면 생기는 여러 가지 장점 중에 한가지인데 영화 고를때 상대방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것이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영화 감상에 대해 맞장구 처주지 않아도 되는것 처럼 매진이 되었어도 한자리 정도는 남아 있다는 걸 K씨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줄은 생각보다 쉬이 줄어 든다. 한번에 두 명씩 세 명씩 빠져 나가기 때문이겠지 8시 4분이 되어서야 K씨는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유니폼을 착용한 체 터치스크린을 다루고 있는 매표소 직원과 맞대면 할 수 있었다.

"어떤 영화를 원하십니까?"

필요 이상으로 간드러진 목소리의 그녀는 K씨 쪽은 처다도 보지 않은 체 목소리와는 전혀 딴판인 무표정한 얼굴로 앞쪽에 세워진 14인치 LCD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물어 왔다.

"8시 5분 표 있을까요?"

역시나 무뚝뚝한 내 대답에 그녀는 재빠르게 모니터 이곳 저곳을 눌렀다.

"좌석이 두 자리 남아 있습니다만 따로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고객님 몇 장이 필요하십니까?"

"한 장이요"

사실 전광판에 매진이라고 버젓이 개시된 영화에 표가 있는지 물어 보는 것도 어지간히 얼굴이 두꺼워야 가능한 질문이지만 혼자 영화 보기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이 지점이다. K씨도 처음 혼자 영화를 보러 왔을 때는 표를 살때 마다 제발 두 자리가 한 꺼 번에 남아 있지 않기를 기도했을 정도였다.-어떤 날은 그냥 두장을 다 사버리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K씨는 한 장만 필요 하니까. 한 장만 필요하다는 K씨의 대답에 아니나 다를까 매표원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K씨 쪽을 힐끔 바라 본다. 영화를 혼자서도 볼 수 있다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타내는 오버스런 감정에 비한다면 한번 힐끗 처다 보고 다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매표원의 반응은 무척 양호한 편이다. 어쩌면 K씨 말고도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어 그다지 신기해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

"혹시 할인되는 카드 가지신 거 있으십니까 고객님?"

K씨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20대를 위한다는 TTL 카드와 지난번에 만들어둔 멤버쉽 카드를 꺼 냈다.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여전히 K씨 쪽을 처다 보지 않은 체 무표정하게 상냥한 인사말을 남긴 직원을 뒤로 하고 서둘러 들어간 K씨는 이미 어둑 어둑해진 극장을 더듬어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오늘은 나쁘지 않다 아슬 아슬 하지만 영화 시간도 늦지 않았고 빵도 싸게 샀고 앞자리에 허리를 너무 곳추 세워 시야를 가리는 사람도 없어서 K씨가 좋아 하는 엉덩이를 앞쪽으로 빼서 의자 깊숙히 거의 눕듯이 앉은 자세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영화만 재미 있으면 만사 OK.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슈크림빵을 씹으며 예고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K씨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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