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친절한 미희씨

초하류 2005. 10. 21. 09:26
걸까 말까 망설이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액정에는 잊을 수도 없는 번호 10개가 차례를 맞춰서 늘어서 있다. 이제 통화라고 쓰여 있는 이 녹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내 조그만 핸드폰에서 발신된 신호가 중계기를 거쳐 교환기를 통해 미희의 핸드폰을 흔들겠지

갑자기 통보 받은 이별이지만 이제껏 목숨같이 지켜온 자존심 때문에 태연히 그러마 대답하고 커피숍에서 먼저 일어 섰을 때 까지는 몰랐다. 빨갛게 깜빡 거리는 센서가 재빠르게 열어젖힌 문 앞에서 잠시 움찔한 건 다른 것이 아니라 따뜻한 커피숍의 공기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차가운 바깥공기 때문 인줄만 알았었지

뒷모습도 멋지게 뒤도 한번 돌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썰렁한 원룸 침대에 몸을 뉘어 봤건만 그대로 잠드는 것은 무리였다. 혼자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서야 겨우 잠들었고 그러기를 벌써 두 달째. 가슴은 답답하고 숨쉬기도 어려웠다. 헤어지자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나를 처다 보던 그녀의 잠시 흔들리던 눈빛, 파르르 떨리는 그 눈동자에 차마 끝까지 다그쳐 묻지 못한 내가 저주스러웠다. 헤어지자는 이유를 들어서 무엇 하랴 만은 이미 고장 나 버린 내 머릿속은 논리적인 사색과는 멀어져 있었고 마치 헤어지자는 이유를 묻지 못한 것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 난 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이별을 선고 받은 이유라도 알면 조금 나아 지지 않을까? 갑자기 퍼뜩 머리를 스친 생각에 누워있다 말고 벌떡 일어나 지금 핸드폰 번호를 모두 눌러 놓고 충혈된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노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중소기업의 말단 사원이라서? 남들처럼 얼짱 몸짱 훤칠하지 못해서? 그 애에만 충실하지 못하고 자꾸만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린 내 바람기 때문에? 뭐라도 좋았다. 이미 난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마저도 사뿐히 내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고통 받는 내 영혼을 구원해 줄 가능성이 1%라도 존재한다면 자존심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뚜르르~~ 한밤중 조용한 방안에서 핸드폰 수화기를 통해 흘러 나오는 신호음은 깜짝 놀랄 만큼 크게 들렸다. 침대 시트가 고무줄처럼 늘어져 저 깊은 바닥으로 쑤욱 가라 앉는 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머리는 뜨거워지고 가슴은 쿵덕 쿵덕 변박자로 뛰기 시작하고 입술이 바짝 바짝 타 들어 갔다. 한참 신호가 갔지만 송화기에선 여전히 뚜르르 거리는 신호음만이 들려 왔다. 발신번호를 보고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아니면 너무 늦은 밤이라 피곤해서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걸까?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을때 작은 잡음과 함께 신호음이 멈췄다. 에써 마음을 가다 듬었지만 역시나 내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살짝 떨리기 까지 했다.

"미희니?"

그러자 수화기 저편에서 대답이 들려 왔다.

"또 미희냐 또 미희여 아니 이 미희가 어떤 년이길래 밤마다 전화가 와서 늙은거 잠도 못자게 혀~~ 워쩐지 전화번호가 좋다 혔어~ 전화 번호를 바꾸던가 해야지 넌 또 누구여 희석이여? 태식이여? 아따 그 미희란년 재주도 좋네 사내도 사내도 아주 굴비로 엮었으면 한두릅도 넘겠네 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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