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정신 붙잡기

초하류 2005. 8. 9. 13:51
찬찬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침착하자 침작하자' 를 되뇌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뭔가 집중할것이 필요했다.

"야 이 새끼야 정신 놓지 말고 기다려 정신 놓치면 거기서 뒤지는거야 알았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구조대원 대리고 금방 올께"

태식이가 구조대원을 데리러 떠난지 10분전이었나? 30분? 아니면 1분? 알수가 없었다. 객관화 시킬 도구를 잃어 버리고 나면 시간이란건 의식의 속도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떨어지면서 바위에 심하게 부딫힌 왼팔은 조물주가 허용한 각도보다 겨우 15도 정도를 넘어섰을 뿐인데 왼손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낄낄 거리며 평소처럼 오르던 산길이었다. 뭔가 잘못될꺼 같은 어떤 징후도 없었다. 꿈자리는 깔끔했고 오늘 아침도 산을 타기로 한 여느날과 조금도 다를것이 없는 아침이었다. 어젯밤엔 비가 왔는지 길이 조금 미끄러운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늘 쉬던 익숙한 바위에 앉아서 커피를 타기 위해 보온병을 배낭에서 꺼낸것도 커피를 따라서 태식이에게 건내줄때 까지도 어디에도 평소와 다른 눈꼽만큼의 차이조차 발견 할 수 없었다.

보온병을 옆에 두고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면서 식혀서 마셨지 한모금이었나? 두모금? 그러다가 몸을 음. 어디보자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가만있자 등에 맨 배낭에 보온병이 걸려서 흔들거리기 시작했으니까 난 보온병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었군 태식이는 내 왼쪽에 앉아 있었고 보온병은 오른쪽에 놓았으니까 그래 몸을 태식이 쪽으로 왼쪽으로 돌렸나 보다.

"어 보온병"

태식이 녀석의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도 조금 덜 허둥될 수도 있었을까? 오른쪽에서 떨어지는 보온병 쪽으로 손을 뻣었지. 그리곤 갑자기 무게가 휘청거린 베낭때문에 뒤로 미끌어지기 시작했었구나. 바위에 앉기 전에 태식이처럼 배낭을 벗어 놓았으면 괜찮았을꺼 같기도 한데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보는것 같았어.. 태식이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비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보였고 조금씩 멀어졌어 그리고 마치 바이킹을 탈때처럼 그래 꼭 바이킹을 탈때처럼 아랫배가 서늘해 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기 시작했어 심장이 멎을것 같았지

그러다 배낭에 뭔가 단단한 아마 바위였던거 같은데 무척 단단한 뭔가에 부딫혔고 내 몸은 다이빙 선수 처럼 매끄럽진 않았지만 옆으로 빙글 돌았었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한바퀴가 도는 느낌은 뭐랄까.. 마치 내가 돌고 있는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뒤집히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런 느낌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어 왼쪽 팔이 나무에 긁히면서 떨어지는 힘과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골절이 되 버렸으니까

머릿속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물감을 확 뿌린것 처럼 눈 앞이 밝아졌어 마치 그리곤 작년에 치과에서 겪었던것 처럼 끔직한 고통이 느껴졌어

"음 이 환자 왜 이렇게 마취가 안돼지 정신력이 강하신가봐요.. 자 한대 더 놓겠습니다."

마스크뒤에 그 치과 의사는 안경마저 두꺼운 뿔테를 끼고 있어서 눈동자만 겨우 보였지 그렇게 마취주사를 몇번이나 맞고 나서 뽑은 사랑니였는데 많이 썩어 있어서 이 뿌리가 끝이 부러져 버렸어.. 잇몸을 찟고 이 뿌리를 들어 냈더랬지 너무 긴장해서 주먹을 꼭 쥐고 말야 그런데 마취가 깊게 돼서 그런지 하나도 안 아프더라구 그래서 조금 안심을 하고 있는데 뻰지같이 생긴 그 망할놈에 기구가 이 뿌리를 잡고 당기는 순간 누군가 뒤통수를 쇠망치로 두드린것 처럼 헉소리 나게 아팠었지. 그래 그때처럼 아팠어

하지만 그땐 말끔하게 차려입은 의사와 두명의 간호사에 둘러 쌓여 있었지 지금처럼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는건 마찮가지였다지만

갑자기 왼쪽팔이 또 다시 미칠듯이 아파왔다. 태식이는 언제 오는걸까 오기는 하는걸까 나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걸까

왼팔은 심하게 부러진거 같은데 다른곳은 어떨까 허리도 움직일수 없는거 같고 뒤통수도 목덜미로 뭔가 끈적한것이 흘러 내리는걸 보니 피가 나는건가..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씨발~~ 태식아~~ 사람살려"

내 귀에도 저 위 등산로까지 들리기엔 소리가 너무 작았지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죽음이 코앞에서 어른거리고 눈이 조금씩 가물거리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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