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

초하류 2004. 12. 24. 15:36
혼자 남은 사무실은 적막하고 쓸쓸하기 이를 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김에 스피커 볼륨을 크게 올려서 캐롤을 틀어 놓았지만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기운만 더했다.

취직이라고 해서는 서울 올라와서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달리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개발실에서 숙식하는 처지에 집이라고 들어가 봤자 오늘 같은 날 아무도 없을 건데 제안서나 써 놓자고 기운차게 야근을 시작했지만 제안서는 맴맴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같이 개발실에서 숙식하는 권대리는 오늘 여자친구랑 데이트가 있다면서 하루 종일 들떠 있다가 6시가 되기가 무섭게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조금 들떠 있는 분위기를 틈타 칼 퇴근들을 해 버렸기 때문에 6시부터는 쭈욱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터였다. 전기스토브 때문에 등은 뜨끈 뜨끈해 오고 일을 하다 말고 자꾸만 웹 서핑을 하고.. 집중이 되질 않았다.

'출출한데 컵라면이나 하나 먹어야겠다.’

야근이 생활화 되어 있는 사무실 분위기에 컵라면은 필수였다. 부스럭 거리며 컵라면을 하나 꺼내서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부었다.

"쪼르르르륵~~"

나이도 짭밥도 밀려서 늘 뒤쪽에서 물을 받을 수 밖에 없던 나는 걸핏하면 미지근한 물로 컵라면이 잘 익지 않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으니 아주 뜨끈한 물로 가득 물을 받을 수 있었다

"혼자 있으니까 좋은 것도 있구만.."

후후 불어 가며 냉장고에서 꺼내온 단무지와 컵라면 하나를 국물까지 비우고 나니 왠지 속이 든든해 지는 게 불끈 힘이 솟았다.

"자 이제 힘내서 한번 끝내 볼까"

120장이 넘는 제안서의 마지막 장을 마치고 나자 시간은 새벽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사무실을 잠그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까지도 몰랐었다. 빌딩 문 앞에까지 와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눈이다. 눈. 눈.. 눈.. 온 세상이 그야말로 하얗게 눈으로 뒤 덮여 있었다.

새벽녘 테헤란로 뒤편 골목길은 소복하게 온 눈으로 평소의 분주함은 간데 없이 동화 속 그림처럼 그렇게 딴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와 이런 게 크리스마스 축복인가.. ‘

우울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으로 가득 차 버렸다. 혼자 미끄럼을 지치기도 하고 눈을 뭉쳐서 간판에 던져 보기도 하고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뽀드득 거리며 혼자 콧노래까지 흥 얼 거리며 걸었다.이윽고 숙소로 쓰고 있는 빌라에 도착했다. 열쇠를 꺼내서 열쇠구멍에 넣을 때 까지도 크리스마스는 내게 축복이었다.

그런데..

20분째.. 빌라의 문은 덜그럭 거리기만 할 뿐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복사해서 받은 열쇠가 가끔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어째서 하필 오늘 같은 날.. 따뜻하게 씻고 즐거운 맘으로 잠이 들려고 하는 오늘 같은 날 문이 열리지 않는단 말인가.. 덜그럭 거리며 애꿎은 열쇠뭉치를 흔드는 내 손위에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서울 올라온 지 1년 이런 저런 힘든 일도 많았건만 어째서 이렇게 아무런 일도 아닌 일에 눈물까지 나는 걸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꽝"

문을 힘껏 걷어찼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

”삐그덕..”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얼굴만 빼 꼼이 내민 권대리였다.

"저 여자친구랑 있거든요"

뭐야 저 곤란하고 처절한 표정은...

"아 .. 에"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눈길은 이미 축복도 뭣도 아니었다. 차가운 사무실에서 의자를 모아 놓고 전기 스토브를 켜며 생각했다.

’이것보다 최악인 크리스마스는 이제 없겠지. 그나 저나 얼마나 거하게 술을 쏘는지 한번 봐야겠군’

스피커에선 여전히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