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블로그 연속극] 요즘사랑 - 5

초하류 2004. 11. 18. 15:27
산부인과에 그것도 나 같이 젊은 사내가 설상가상으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들어서자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추러 들었다.



천방지축이긴 하지만 역시나 나경이도 병원에 들어서고는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심지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으니까..



난 어쩌다 이런 말도 안돼는 일에 말려 들어 버렸을까.. 머릿속은 뒤죽박죽에다 몸을 움추리고 있었던 탓인지 어깨까지 결려왔다.



“허나경씨 들어오세요”



마치 긴급 탈출 버튼을 누른 비행사가 조종석에서 튕겨져 나가는듯한 기세로 벌떡 일어선 나경이는 내쪽을 돌아 보지도 않고 조용하게 내게 말했다.



“갔다 올 테니까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려 그냥 갔다가는 죽음이야..”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아침에 뒹굴 거릴 때는 30분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더니 이 병원 벽에 걸린 벽시계 초침은 어째서 한바퀴 도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단 말인가 시계가 커서 그런가?



30분이 지나고도 5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나경이가 들어갔던 진찰실 문이 열렸다. 얼굴색이 몰라보게 파리해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나오는걸 보자니 이걸 부축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자세는 엉거주춤 일어서야 할지 앉아야 할지.. 정말 난감 그 자체였다.



“나가자.. 나 맛있는거 먹고 싶어..”



“어.. 어..”



나경이는 침통한 표정에 가냘픈 몸과는 전혀 상관없이 꽃등심 4인분을 시키더니 굽기 시작했다. 침통한 분위기에도 여전히 왕성한 내 식욕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뭐 어쩌랴 난 아침잠도 설치고 지금 시간은 오후 3시건만 오늘 한끼도 못먹었는데.



고기가 적당히 구워지자 나경이는 왼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이모 여기 참이슬 한병 주세요”

잘 아는 맛있는 집이라며 굽이 굷이 골목길을 한참을 돌아서 들어온 조그만 고기집이 떠나갈 듯 짜랑 짜랑한 목소리였다. 저런 얼굴 표정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세삼 놀랐던 나는 참이슬이란 말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주인 아주머니가 한번의 의심도 없이 참이슬을 가져다 주셨다는 사실이다.



“야 너가 가는 곳은 어째서 이렇게 미성년자 한테도 척척 술을 잘 내주냐..”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나경이의 한쪽만 쌍커플이 있는 왼쪽눈이 찡긋 올라 갔다.



“유비 아저씨 지금 내가 미성년자로 보여?”



어? 아 그러고 보니 .. 음.. 교복을 입고 난리를 쳤던 그날과는 달리 무릅까지 오는 버버리 체크 스커트에 검은 조끼를 흰색 니트 위에 받쳐 입고 얇게 화장까지 한 나경이는 누가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 그리구 너.. 술 마시면 안돼는거 아냐? 그 산부인과에서 방금 나왔잖어..”



저절로 기어 들어가는 내 말꼬리..



“의사가 고기 많이 먹으랬어 난 소주 없인 고기 못 먹는단 말야”



“그.. 그래두 너 그 이이..ㅁ 신…”



나경이의 왼쪽 눈이 다시 찡긋 하더니 자기 앞에 소주잔을 체우곤 탁 소리 나게 술병을 내려 놓아다.



그리곤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내쪽으로 까딱 거렸다.



뭐 어쩌라구..



“유비 아저씨 이렇게 입과 귀가 먼데도 귓속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어.. 아… 미안..”



그녀는 내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의사 아저씨가 내가 심각한 생리불순이래 몸이 약해서 그렇다나? 고기 많이 먹고 몸 보신 해야 된다 그랬어”



그 꽃등심에 혹시 누가 약이라도 탔단 말인가 막 무가내로 끌려 들어온 클럽에서 그녀는 스트레이트 1시간째 무대를 휘졌고 있었다.



난 그애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쪼르륵 6병이나 줄을 서 있는 버드와이져를 처다 보고 있는 중이었다.



무대에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현란한 춤솜씨는 그냥 좀 노는 불량 여고생 수준이 아니었다. 필이 철철 넘쳐 흐르는 동작 하나 하나가 프로 댄서 같았다.



그녀가 무대를 휘 젖기 시작한지 정확히 20여분 만에 무대에서 춤추던 여자들은 각자의 테이블로 찌그러져 버릴 지경이었으니까..



한참을 멍하니 나경이를 처다 보고 있다가 핸드폰을 떨어 트릴 뻔 했다. 부르르.. 나경이의 전화가 울렸다.



아무리 손짓을 해도 보이지가 않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무대로 올라가 핸드폰을 춤추는 나경이 눈 앞에다 들이 밀었다.



오 그러자 정말 엄청난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쿵쾅 거리는 힙합음악으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야 할 판에 그녀의 소리치는 목소리가 정확히 내 귀에 들렸던거다.



마치 뭐랄까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 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거대한 스피커로 들리는 비트 위를 떠 다니고 있었다.



“아빠? 도착했어? 알았어 지금 갈께…..”



그리고 그녀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바람처럼 클럽을 빠져 나가 버렸다.



에고 잘 됐네 이제 빚 진것도 다 갚았으니 뭐 다시 볼일도 없을 것이고 뭐에 홀린듯 곤란한 일들 투성이였던 이번주는 그냥 잠깐 꿈을 꿨던 거라고 생각하지뭐..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니 피곤이 밀려 들었다. 내일은 일요일 이니까.. 푹 잘 수 있겠지.. 그래. 오랜만에 푸욱 늘어지게 자고 다음주를 준비하자…



침대에 누우려고 하자 갑자기 드르르 울리는 핸드폰



“유비 아저씨 오늘같이 가줘서 고마웠어 사실 나 많이 무서웠거든 휴일 푹 쉬고..”



근데 어째서 문자를 읽었는데 그 특이한 목소리가 써라운드로 들리는 거지… 에고.. 모르겠다 어쨌든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