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추석 전날밤

초하류 2005. 9. 20. 17:39
명절 전날은 언제나 그렇듯 술과 함께다. 처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해가 저물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슬그머니 옷을 차려 입고 어머니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뒤로 한체 동내를 나섰다. 어쩌다 오늘의 안주로 정해진 횟집을 찾기 위해 1시간여를 헤매다 찾아 들어간 동내 앞 헐 직한 횟집은 훤칠한 청년의 첫 번째 환대와는 다르게 찌개다시를 하나 추가할 때마다 몇 번이나 여기요를 외치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하지만 셋이서 충분히 먹을만한 우럭 한 접시가 2만원이라니 뭐 그럭저럭 재치 있는 가격 아니겠는가

몸에 좋은 백세주를 차마 원액으로는 마실 수 없어 이슬로 브랜딩해서 만든 오십세주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알콜에 젖어서 와이프에게서 형수라는 타이틀이 떨어져 나갔고 동생에게는 시동생이란 타이틀이 떨어져 나갔다. 내게 붙어 있던 장남이란 타이틀도 떨어져 나간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우리는 발가벗은 세명의 이른바 대한민국의 자연인이 되어 각자에게 걱정되는 몇 가지와 불만스러운 몇 가지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석사코스를 밟고 있는 막내는 교수를 씹고 공돌이로서의 취업에 대해서 슬퍼 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어쩌면 나보다 높아질 연봉을 이야기 하며 낄낄댓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월급쟁이 빠듯한 월급으론 내 팔 흔들 재간밖에 없으니 학부 때처럼 빵꾸 내고 난장질 치면 난 모른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스케줄대로 졸업해서 취업을 해야 한다는 꼰대스런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었고 와이프는 막내녀석을 붙들고 나를 씹어 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는 나를 버려 두고 둘이서 손을 잡고는 앞장을 서서 걸어 가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막내 녀석을 때린 적도 없고 갈군 적도 없건 만은 와이프에게도 딴에 잘한다고 열심히 했건 만은 두 사람은 마치 과장을 씹는 두 명의 대리처럼 죽이 잘 맞아 들어갔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뒷모습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걸?

벌써 모두 주량은 넘어 섰건만 뭐가 아쉬웠는지 왁자지껄 사 들고 들어간 언제 어디서든 파티가 된다는 맥주와 함께 추석 전날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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