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하다

똥은 계속 더러워도 되는가?

초하류 2011. 8. 2. 14:42
한진중공업 사태는 더도 덜도 아닌 현재 시점의 대한민국의 의식수준이 적나라하게 들어내 보인다.

거기에는 직원을 회사의 파트너가 아닌 착취와 소모의 대상으로만 계량하는  사측이 버티고 있다. 사측에서 저지르는 왠만한 불법(용역 동원, 동원된 용역이 경찰과 같은 무장을 하고 있는 점)을 저질러도 눈을 감는 공권력이 있다. 공권력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용역들의 불법에 둔감하고 저 고공에 홀로 올라 앉은 여성에게는 철저하게 법의 잣대를 들이덴다.

개인적인 울분과 사회모순에 분노해서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희망버스에 올랐건만 공권력에 의해 저지 당하고 최류액을 맞아가며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로를 점거하고 사람들을 구타 하고 버스에 올라서 막무가내로 신분증을 내 놓으라는 어르신들에게 서슬 퍼렇던 공권력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린다.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의 어두운면이 까발려 지는것이 불편한 사람들은 타지의 방문을 거절 하고 나랏님들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며 뒷짐을 지는척 하지만 현장에서 전해 지는 소식은 과연 나랏님들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짐작게 한다.

더 싼 노동력을 찾아 떠나는 공장은 자본주의에서 어쩔수 없는 것이라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자본의 논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본주의를 채택한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자본주의를 선택한 것은 우리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익 몇 %를 위해 회사를 같이 키워온 노동자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팽게치고 알량한 법의 뒤에서 나 몰라라 하는 자본가들과 그 자본가들을 비호하는 이른바 비지니스 프렌드리 정부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성장을 위한 성장은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해준다.

맨살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 크레인 꼭대기에서 오랜 투쟁으로 위장을 버려 죽밖에 먹을 수 없는 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죽을 폭팔물 탐지기로 이리 저리 휘저어 올려 보내는 자본과 그 자본을 비호하는 국가.

 21세기 대한민국은 겉은 번지르하지만 매년 여름 쏟아 지는 비에 무릅까지 잠겨 버리는 수도서울 처럼 말쏙하지만 어딘가 많이 불편한 모습으로 절룩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