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팍으로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2016년은 돼지띠이신 아버지가 칠순이 되시는 해였다. 아버지 생신이 몇 달이나 남은 연초에 어머니의 닦달로 회갑 때처럼 조촐하게 친지 분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겨우 10년이 지난 회갑때와는 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꼬맹이였던 사촌 동생들은 대학생이 되고 몇몇은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친척 어르신들은 더러는 돌아가시고 더러는 편찮으셨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그날의 주인공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께서는 치매가 많이 진행 되신 상태였다.
치매는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정신적 부분, 기억과 사고능력들이 살아 있는 육신에서 천천히 조금씩 사라진다. 마치 얼음이 물을 거치지 않고 수증기로 기화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대부분의 평균적인 경상도 부자지간들 처럼 나도 아버지도 서로에게 살갑게 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해마다 한장씩 가족 사진을 찍으셨고 생일이나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빠짐없이 선물을 하시는 나름 자상한 분이셨지만 그런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나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신 적이 없다.
초등학교때 까지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잘못한 일보다 몇곱절의 매질을 마다 하지 않으셨고 어쩌다 못하시는 술을 많이 드신 날에는 나와 동생들을 불러 앉히시곤 세상 사람들은 다 착하다. 다 너희들 할 노릇이다라는 주제의 훈계를 하셨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집 근처 맥주집에 나를 불러다 놓고 이제 어른이니 니 인생은 니가 알아서 헤처 나가야 한다고 말씀 하신 정도?
아버지가 치매 라는 사실을 처음 안것은 아버지의 환갑날이었다. 아버지 환갑 식사 자리를 위해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차에 타라고 하시더니 동네 어귀로 가서는 차를 세우 시고는 내 손을 잡고 말씀 하셨다.
“나는 그저 큰놈인 너만 삐뚤어지지 않으면 동생들은 다 따라 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를 그렇게 많이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된다. 내 성을 이기지 못해서 손발로 너를 때렸는데 그렇게 살과 살이 부딪히면 감정이 쌓여서 그게 두고 두고 남는다는구나. 너를 미워해서 때린적은 한번도 없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하시곤 한참을 내 손을 잡고 우셨다. 그리고 생에 처음으로 운전대를 내게 넘기시고는 조수석에 앉으셨다. 나는 그저 그런 아버지가 낯설어 말없이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조촐한 식당에서 친척들을 모시고 식사를 한 환갑잔치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아버지가 치매 초기라고 말씀 하시고는 한참을 우셨다.
나는 아버지의 치매를 받아 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온 집안에 대소사를 꼼꼼하게 챙기시고 뭐든 칼같이 정리하는 한마디로 똑 부러지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회사에서 회계장부를 전산화 할 때 대구지사의 데이터들이 가장 많은 오류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가 너무 철저한 이미지셨기 때문에 오히려 대구 지사에서 올라가는 데이터들은 본사에서 결산을 게을리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께 상용한자 문제집을 사서 보내 드렸다.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고 어머니를 지키셔야 한다고, 내가 아는 아버지는 강하신 분이니 문제집으로 두뇌활동도 계속 하셔서 치매도 이겨 내십사 라고 쓴 편지와 함께
하지만 치매는 조금씩 아버지를 잠식해 들어갔다. 대구에 내려 갈 때 마다 아버지의 상태는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나빠지셨다. 내가 차를 가져 왔는지를 거듭 거듭 물으시고 늦게 태어난 손녀가 누구 딸인지 되풀이해서 물어 보시더니 어머니에게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하시거나 갑작스럽게 짜증을 내시기 도 하고 몇 번은 길을 잃어 버리셔서 어머니와 근처에 사는 여동생네 그리고 다니시는 성당 분들이 온 동네를 뒤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점 점 더 티브이에서나 보던 치매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가셨고 결국 자식들도 알아보지도 못하셨다.
칠순 잔치가 끝나고 몇달 지나지 않은 월요일, 술자리 약속에 서두르던 퇴근길에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대구로 내려갔다. 몇일 밤낯을 대구에 내려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번갈아 가며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삐삐 거리며 녹색 곡선을 그리는 알 수 없는 장비들의 소음 속에서 주렁주렁 생명유지장치들을 매단 늙고 쪼그라든 아버지의 헐떡거리는 모습을 밤새 지켜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아버지, 넉넉지도 않은 살림에도 왜 일년에 한번씩 온 가족을 사진관에 대리고 가셔서 가족 사진을 찍으셨나요? 집에 있는 카메라로 찍어도 되는데.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도 저를 때리시던 분이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때리지 않겠다는 말씀을 지키실 수 있으셨나요?
아버지, 공부 잘하던 제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석차가 점점 떨어졌을 때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it일을 한다고 했을 때 몇 달간 급여도 못 받고 허덕거리고 있을 때도 내 아들이라면 잘할 것이라며 어떻게 그렇게 저를 완전히 믿으실 수 있으셨나요.
어째서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모른 체 살아 왔을까
그리고 또 생각했다. 10년전 그때, 아직 치매가 아버지를 이렇게나 잠식해 들어가지 않았을 때, 아버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 용기를 내어 내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 아버지를 왜 한번 껴안아 드리지도 못했을까?
그저 강해 보이기만 하던 아버지의 눈물과 갑작스런 사과에 당황하고 어머니가 눈물로 전해 주시는 아버지의 상태를 받아 들이지 못한 어리석었던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시거든 꼭 안아 드려라. 아버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한다고 말씀 드려라. 더 늦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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