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류's Story

피 나누기

초하류 2006. 7. 25. 11:34
초하류는 조금 특이한 혈액형 덕에 가끔 헌혈을 부탁 하는 전화를 받는다. 더 가끔은 네거티브 클럽 헌혈요청 게시판의 게시물을 읽고 헌혈을 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나이가 어릴때는 아무 생각없이 헌혈을 했었다. 잠깐 누워서 피를 뽑고는 공짜로 마시는 콜라와 맛없는 과자 그리고 몇가지 조잡한 증정품 사이에서 잠깐 헷갈리다 나오면 그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헌혈에 대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쨌든 피를 뽑아 낼 수 있을 만큼 굵은 파이프를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늘 비슷한 위치의 혈관에 상처를 내면서 한참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귀여운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헌혈을 종용하는 캐릭터의 표정 보다는 훨씬 심각한 일이 아닐까?

거기다 전혈의 경우와는 틀리게 혈소판 헌혈이라도 할라치면 뽑아낸 피를 분리하고 나머지를 다시 몸으로 넣어 주는데 뽑아낸 피가 응고 되지 않도록 섞는 구연산때문에 몸에 저릿하게 반응이 온다. 나 같은 경우는 입술이 약간 민감해 지고 목이 조금 타는 정도지만 심한 경우는 실신을 할 수도 있다고 하니 이것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헌혈이라는 것이 몸속에 지닌 여분의 피를 뽑아 내는 것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여분의 피가 다시 체워지기 까지는 헌혈한 사람의 몸은 혹시나 피를 흘리는 상처에 대해 무방비가 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더 부담스러워 지는 헌혈이지만 헌혈을 요청 하시는 분들의 자세에 따라 꼭 헌혈을 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목소리 만으로도 그 사람이 얼마나 정중하게 요청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감사합니다란 말에 묻어 있는 그 절절한 고마움은 내가 가지는 헌혈에 대한 부담감을 한번에 씻어 내리기에 충분하다. 단지 한번 헌혈을 해 드렸을 뿐인데 해마다 신년이 되면 문자로 건강을 물어와 주시는 분에 이르면 정말 황송하기 이를대가 없다.

하지만 늘 그렇게 좋은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번엔 급성림프구성혈액암으로 수술 하신 분에게 보름 사이에 두번이나 혈소판 헌혈을 해 드렸다. 혈소판 수치가 자꾸 나빠져 죄송하지만 꼭 부탁 드린다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헌혈을 해 드리긴 했지만 왠지 냉냉한 아주머니의 말투에 자꾸 피가 아까운거 같고 뭔가 손해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름 사이에 두번이나 헌혈을 했더니 팔뚝에 주사자욱이 여기 저기 남아있어서 마약중독자 같다며 친구들과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아주머니는 스스로 최선의 정중함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말씀 하신것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살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더라면 헌혈을 하는 내 마음도 훨씬 가벼웠을 것이고 친구들과 아마 시아버지를 간호 하는 며느린가봐 라며 악의적인 농담으로 낄낄 거리는 죄를 짖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덕분에 당분간은 헌혈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지 않기를 바라게 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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