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단편] 8:30

초하류 2010. 8. 17. 17:12
목도리에 파묻은 턱이 차가운 정도를 지나 이제는 얼얼해 왔다. 주머니에 넣은 손은 좀 덜했지만 딱딱한 가죽과 얇은 양말 정도로만 보호 받고 있는 발은 그 끝 단부터 아려오기 시작한지가 이미 오래 전이었다. 슬쩍 시계를 봤다.

8:30

시간을 잘못 볼 한치의 여지도 없는 액정화면 속 숫자들은 또박 또박 내가 시계를 보고 있는 사이에도 깜빡 거리는 두 개의 점에 맞춰서 초 쪽으로 더하기 일을 해대고 있었다.

약속장소인 스타벅스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길 건너편. 약속시간인 8시에서 이미 30분이 지나고 지금도 깜빡 거리는 초단 위 시간들이 약속시간에서 멀어 지고 있는데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이윽고 다시 깜빡이다 붉은색으로 바뀔 때도 나는 여전히 코를 머플러에 묻은 체 발만 동동 거리고 있었다.

"나 할말 있어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일주일 넘게 연락이 안되던 그 애의 전화 목소리

그렇게 자잘한 0과 1로 나뉘어서 허공에 막무가내로 뿌려졌지만 21세기의 과학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애의 목소리를 또박 또박 조립해서 내 가슴을 덜컹 내려 앉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노려보던 하얀 도화지 선생님이 내주신 구성 주제에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시간은 째깍거리던 그때 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 있지.. 어디서 볼까?"

"8시에 종각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괜찮겠어?"

"어.. 그래 있다가 보자"

그렇게 감정을 말끔히 지우고 하얗게 사무적인 목소리로 또박 또박 말해오는 그 애 목소리 앞에서 다른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까맣게 타버린 마음으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베개에 머리를 묻고 뒤척였던 먹먹한 가슴 차라리 가타부타 전화로라도 확실한 대답을 들으면 좀더 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부질없는 생각들

"나 우리 관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아 한동안 전화 안될 거야 연락할게"

액정으로 배달된 몇 글자 안 되는 짤막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들에게 그렇게 일주일을 짓눌려 힘들어 했건만 막상 전화가 와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8시에 가까워지자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8시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퇴근을 위해 책상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끄면서도 종각에 가기 위해 전철에 올라 타는 그 순간에도 어두운 땅속으로 가까워지는 약속장소와는 무관하게 내 마음은 자꾸만 8시로부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7:40분

개찰구를 통과하며 힐끔 처다 본 핸드폰의 액정은 이미 내가 가까워진 물리적인 약속장소 만큼이나 약속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조금 분비긴 했지만 굳이 계단으로 걸어 올라간 까닭도 8시로 부 터 도망치려는 내 의식과 무의식의 결과였다 드디어 전철역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자 아래쪽부터 내 발걸음에 맞춰 쑥쑥 올라오는 스타벅스의 길 건너 모습은 새로 장만한 최신형 컴퓨터에 걸어 놓은 렌더링 이미지처럼 너무 또렸하고 너무 빠르게 다가왔다.

7:55분

신호등의 깜빡 거리는 붉은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인도에서 차도로 첫걸음을 내 딛는 데는 큰 심호흡이 필요했다. 하지만 차도로 첫걸음을 내 디딘 나는 움찔 놀라며 내 디뎠던 발을 다시 걷어 들였다.

혼잡하고 매연 가득한 종로 한복판에서 심호흡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긴 머리를 깡총하게 자르고 재색 페딩코트를 입은 그녀가, 길 건너편에서 스타벅스로 향하는 그녀가 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한번의 곁눈질도 없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스타벅스앞에 도착한 그녀는 역시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스타벅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이봐요.."

뒤쪽에서 부딫힌 정장 입은 말쑥한 남자의 짜증 섞인 한마디에 내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서서 지나가 버린 그 남자의 뒤쪽에 사과를 해야 하나 멍해 있는 그때 내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8:00

그래 벌써 약속시간 정각이었다.

"어디야?"

여전히 딱딱한 그녀의 목소리 앞에 나는 어릴 적 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움찔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으..응.. 갑자기 회사에서 일이 생겨서 지금 출발하려 구.."

"그래? 나 스타벅스 2층에 있으니까 앞에 오면 전화해"

"어.. 알았어.."

그리고는 그 신호등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손에 입김만 호호 불뿐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째깍 거리며 흘러 가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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