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류's Story

헌혈을 하고

초하류 2011. 6. 9. 12:35
프로젝트 검수를 위해 고객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주려는 사람과 더 받아 내려는 두 사람이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원하는것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한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을 자꾸만 깨트리는 핸드폰의 진동.

형식화된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들여다본 지나치게 커다랬지만 이제는 너무 커져버린 다른 핸드폰 액정과의 비교때문에 작아진 아이폰 액정을 통해 몇개의 단어가 들어 온다. 긴급, 헌혈,.. 화면을 끄고 다시 줄다리기로 들어가려는 찰라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줄다리기가 끝나고 몇개의 싸인을 하고 나자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내일 아침 급하게 수술 해야 하는 딱한 사정은 본인에게야 얼마나 다급한 일이겠냐만은 내게는 겨우 5시 30분에 상사가 소집한 회의전에 마칠 수 있는지 정도와 저울질될 수준이다.

다행히 생각보다 빨리 끝난 미팅 덕분에 헌혈을 할 수 있을것 같은 시간에 강남역에 도착했다. 팀장님께 보고를 하고 헌혈을 준비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일의 경중은 다시 달라진다. 내 혈액형이 흔하지 않거나 내 피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다급하거나 내가 얼마만큼의 개인 시간을 희생해서 거기에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가 뽑은 번호표가 40번이고 내 앞에는 5명의 대기자가 문답을 해야 할 뿐이다. 하릴없이 시간은 흐르고 하나 마나한 질문과 답변이 지루하게 기계적으로 반복된 후에야 채혈기계에 자리할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너무 많이 지나 회의에 참석하기는 틀려먹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준비과정을 모두 없던걸로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명분도 낮짝도 부족하다.

기계는 내 팔을 압박했다 풀었다를 반복 하면서 받아낸 피를 걸러 혈청은 따로 모은 다음 나머지를 내 팔을 통해 몸으로 밀어 넣는다. 찌릿찌릿한 느낌. 입술에 느껴지는 찌릿함이 몸전체로 번저갈 즈음 40여분의 시간이 흐른끝에 드디어 채혈은 끝이 났다.

고맙습니다라는 상냥한 사무적인 인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나는 도덕책에서 배운것 같은 뿌듯함이나 착한일을 했다는 보상감 은 간대없고 여남은게 되는 선물중 고른 작은 우산과 헌혈증을 들고 회의에 늦어버렸다는 조급함으로 사무실로 바쁘게 움직인다.

늦은 저녁 샤워를 하다 보니 팔뚝에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시간과 내 몸의 귀한 피를 뽑아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줬지만 예전처럼 보람있거나 뿌듯하지 않다. 나이가 드는 만큼 마음도 몸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간다. 쓸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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