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하다

수능 컨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초하류 2004. 12. 4. 18:06
이번 수능에서 핸드폰을 이용한 첨단 부정행위가 연일 황색지면을 달구고 있다. 싼티나서 만들기만 하고 안 팔리던 엘쮜 핸드폰은 졸지에 선수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급기야 전체 문자메세지를 필터링 해서 46명인가가 추가로 잡혀 들어갔다.



비행기도 못뜨고 공무원 출근시간도 늦춰지고 싸이렌 왱왱 거리는 호송차량까지 동원해서 치르는 이 국가적인 한바탕 푸닥거리에서 감히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니 이를 어찌 눈뜨고 보겠는가 저 녀석이 올린 점수 2점은 바로 내 점수를 깍아 내리는것인데 말이다.


과연 전 국민의 문자를 필터링하면 컨닝한 놈이건 년이건 싸그리 잡아 들일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되겠다. 어리버리한 애들이나 증거 질질 흘리고 다니지 진짜 선수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당장 내가 아는 4명의 아이들은 나와 같이 학력고사를 찰때 핸드폰 그딴거 없어도 아날로그 팔목시계 하나로 컨닝을 시도했고 4명 모두 허접한 지방대지만 합격했다.


방법은 이러하다. 각각 자신이 자신있는 과목을 정한다. 그리고 모두 모여서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똑같이 맞춘다. 그러면 만사 OK다.


시계판을 4등분해서 각 문제의 해답때 마다 기침을 해서 서로에게 답을 알려준것이다.


겨울에 시험치는데 1분 단위로 기침 좀 콜록 거린다고 뭐라할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4명 덕분에 억울한 다른 4명이 대학문을 최소한 그해에는 밟지 못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이것 저것 생각하다 보면 컨닝 하는 놈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전해져 내려오는 옛말이 있지 않는가


열명이 한 도둑 못 잡는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도 도포자락에 깨알같이 사서삼경을 배껴서 가지고 들어 갔다니 컨닝은 고래로 부터 끊임 없이 시도된 모양이다. 누군가는 들켜서 응분의 댓가를 치르지만 누군가는 성공의 짜릿한 쾌감을 맛본다.


나는 이 싯점에서 무척 궁금하다. 수능이란 무엇인가.


수능이란 대학교 입학시험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수능 당일은 전국민은 물론 공중파를 포함한 모든 언론이 수능을 위해 봉사한다.


단지 대학교 신입생이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날인데 어째서 이렇게 온 나라가 떠들썩 한가


대학교에 들어갈 나이대를 4촌 이내 친척들이 모두 훌쩍 넘겨 버린 나도 몇일전부터 카운트다운 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 모든것이 수능은 단순히 대학 입학 시험이 아니라는것을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대학이 단지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상아탑이 아니라는것을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수능을 치는날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공무원이 출근 시간을 늦추고 싸이렌을 울리며 수험생들을 학교로 실어 나르고 공중파들이 온통 몇일전부터 열을 올려 방송을 해대는 이상 우리나라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이 사라지는것은 요원하며 학생들의 컨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앞차가 밀려서 파란불인데 서 있다. 5초도 지나지 않아서 뒤쪽 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파란불인데 차가 지나가지 못하고 서 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건 뻔한 사실이다. 하지만 뒤쪽의 차들은 일제히 신경질적으로 클락션을 울려 댄다.



뭔가 자신의 차례를 공평하지 못한 방법으로 침해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부지 불식간에 들기 때문이다.



어릴적 내가 충격 받은 아버지 대사중에 이런말이 있었다.



"컨닝도 요령이다."



컨닝은 불법이나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안 들키고 표시 안나게 할 수 있으면 그것도 요령이란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만 한건 아닌것 같다. 내가 거친 국민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동안 컨닝은 들키지만 않으면 시험 끝나고 자랑을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책을 요약해서 읽거나 수학공식을 이해 하는것 처럼 시험 잘 치는 요령의 일부였다.



점수 몇점 올리기 위해 남의 시험지를 흘낏 거리는짓에 나를 포함해 누구도 그다지 부끄러워 하지 않는것 같았다. 고등학교때 까지는 눈이 나쁜데도 고집스럽게 안경을 끼지 않아서 대학교때는 귀찮아서 컨닝을 잘 하지 못하는 나같은 몇몇 특수한 부류를 빼 놓고 컨닝이란 그냥 일상 이었다. -물론 나도 책상에 몇자 적어 놓는 초보적인 컨닝은 수없이 시도했었다. 출제된적은 적었지만-



심지어 대학교때는 공부 잘하는 여자친구 잘둔 덕분에 컨닝으로 장학금을 타는 녀석까지 있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한가지 였는데 나야 어차피 공부를 하지 않았고 그 녀석은 원래 부터 나보다 공부를 잘 하는 녀석이어서 별 상관이 없겠지만 컨닝때문에 장학금을 못탄 녀석은 어째서 컨닝에 대해서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 녀석과 그 여자친구의 컨닝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컨닝을 해서 탄 장학금에 테클을 거는 녀석은 한명도 없었다.



다만 술 먹으면서 예쁘고 싹싹한데다가 공부까지 잘해서 컨닝 시켜 주는 능력 좋은 후배를 사귄 녀석의 능력을 부러워 하는 푸념을 들었을 따름이다.



아마도 컨닝을 100% 근절 시킬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컨닝을 한다는 행위가 부끄러운 짓이란건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감독관만 보지 않는 다면 시험 치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도 아무런 양심의 꺼리낌없이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시험의 요령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렇게 학교에서 배운 요령들이 사회에서는 인맥 만들어서 서로 밀어주고 아는 사람은 표도 먼저 끊어 주고 병원 응급실도 먼저 들여 보내주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고장난 양심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가야할 파란 신호등에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내가 가지 못한다면 뭔가 부정한 일들이 내 앞에서 일어 나고 있다는 상상에 클락션을 누르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 받는 시험에서 컨닝이 눈치 봐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시험의 당연한 요령의 일부라는 웃기는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수능 컨닝은 사라 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