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무한 경쟁으로 스스로들을 그리고 그 주변을 몰아 가고 있다.
인간 본성에 비해 너무 고상하지만 천박한 인간 본성으로 인해 효율적이지 못했던 공산주의를 버리고 천박하지만 딱 그만큼 천박한 인간 본성으로 인해 효율이 극대화되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획일화 시키고 있는것이다.
지율스님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와 실리 모든면에 있어서 무모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출발이 늦은 만큼 앞에서 달리는 호랑이들과의 차이는 좁히기가 힘들고 앞서 달리며 내뿜는 먼지에 가뜩이나 늦은 발걸음이 더 힘이 들수 밖에 없다.
지율스님의 단식은 우리를 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오라는 순수한 한 인간의 의지였다.
하지만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우리는 호랑이게게 물어 뜯겨 처참한 죽음을 당할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그 호랑이의 등에 끝까지 성공적으로 매달려 있다고 한들 우리에게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것은 아니다.
따뜻한 지구와 거대한 덩치라는 단순한 축복으로 2억년이라는 번성의 시간을 약속 받았던 공룡에 비해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과 현제의 무한경쟁 그리고 자연의 무차별적인 파괴는 섬뜩하게 대조적이다.
우리는 100년 안쪽의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산을 뚤고 물을 더럽히는 근시안들이기도 하지만 1000년 10000년 뒤의 인류를 위해 더럽힌것들을 자본을 들여 치우고 정화하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조정들이 우리 인류라는 종의 번성을 언제까지 지켜줄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들은 이미 지구를 정화하는것은 늦은 것이고 단지 죽음의 순간을 늦출수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다른편에서는 개발이 오히려 자연 파괴를 줄이고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단기적인 목숨과 장기적인 종의 보존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우왕 좌왕하는 현재의 모습은 분명 어떤 과도기적 변혁기에 나타나는 혼란의 상태와 비슷하다.
우리가 자각한 환경의 파괴에 대한 인식이 늦지 않은 것인지 현재를 사는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점점 환경이 중요한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보편화는 지율스님과 같은 무모한 노력들이 중심이라는 점이다.
인간 본성에 비해 너무 고상하지만 천박한 인간 본성으로 인해 효율적이지 못했던 공산주의를 버리고 천박하지만 딱 그만큼 천박한 인간 본성으로 인해 효율이 극대화되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획일화 시키고 있는것이다.
지율스님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와 실리 모든면에 있어서 무모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출발이 늦은 만큼 앞에서 달리는 호랑이들과의 차이는 좁히기가 힘들고 앞서 달리며 내뿜는 먼지에 가뜩이나 늦은 발걸음이 더 힘이 들수 밖에 없다.
지율스님의 단식은 우리를 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오라는 순수한 한 인간의 의지였다.
하지만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우리는 호랑이게게 물어 뜯겨 처참한 죽음을 당할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그 호랑이의 등에 끝까지 성공적으로 매달려 있다고 한들 우리에게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것은 아니다.
따뜻한 지구와 거대한 덩치라는 단순한 축복으로 2억년이라는 번성의 시간을 약속 받았던 공룡에 비해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과 현제의 무한경쟁 그리고 자연의 무차별적인 파괴는 섬뜩하게 대조적이다.
우리는 100년 안쪽의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산을 뚤고 물을 더럽히는 근시안들이기도 하지만 1000년 10000년 뒤의 인류를 위해 더럽힌것들을 자본을 들여 치우고 정화하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조정들이 우리 인류라는 종의 번성을 언제까지 지켜줄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들은 이미 지구를 정화하는것은 늦은 것이고 단지 죽음의 순간을 늦출수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다른편에서는 개발이 오히려 자연 파괴를 줄이고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단기적인 목숨과 장기적인 종의 보존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우왕 좌왕하는 현재의 모습은 분명 어떤 과도기적 변혁기에 나타나는 혼란의 상태와 비슷하다.
우리가 자각한 환경의 파괴에 대한 인식이 늦지 않은 것인지 현재를 사는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점점 환경이 중요한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보편화는 지율스님과 같은 무모한 노력들이 중심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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