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장 51

솔로 K씨의 영화보기

"나 오늘은 좀 일찍 퇴근 할께" "뭐야 드디어 솔로 탈출 한 거야? 데이트라도 있는 거야?" K씨는 특별한 대답 없이 그저 씽긋 웃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서른을 훌쩍 넘어서 아직도 솔로인 K씨는 유일한 취미인 영화를 보기 위해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어 버린 야근을 뒤로 하고 오늘도 사무실을 서둘러 나오는 중이다. 얼마 전 K씨가 살고 있는 외곽 아파트 근처에 들어선 멀티플렉서 덕분에 영화보기가 한결 수월해졌건만 계속되는 야근에 차일 피일 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 한가해진 오늘 저녁을 놓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철역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정해진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K씨에겐 언제나 낯선 일이다. 주머니를 부스럭거려 PDA를 꺼낸 K씨는 우선 이어폰을 귀에 ..

창작극장 2006.01.12

헤어지다

그래 그날은 하늘이 그렇게 파랄수가 없는 그런 날이었어 손을 충분히 높이 들수만 있다면 손바닥 가득히 파란물이 묻어날것만 같은 그런날이었지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적당한 크기로 둥둥 여기 저기 떠 있었어 오랜만에 가벼운 옷으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겨루기라도 하는것 처럼 행복한 웃음으로 사뿐 사뿐 걸어 다니고 있었지 그렇게 하늘이 파랗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이쁜 하얀 구름이 떠 있지만 않았다면 난 아마 그 벤치에서 일어 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사람들이 많이도 지나 다니는 그 벤치에서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서 울어 버렸을지도 몰라 "미안해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할 만큼은 널 사랑하지 않은거 같아" 내 눈을 처다 보며 말 하지 않은건 너도 나만큼 힘들기 때문이었을까? 굳은 표..

창작극장 2006.01.10

친절한 미희씨

걸까 말까 망설이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액정에는 잊을 수도 없는 번호 10개가 차례를 맞춰서 늘어서 있다. 이제 통화라고 쓰여 있는 이 녹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내 조그만 핸드폰에서 발신된 신호가 중계기를 거쳐 교환기를 통해 미희의 핸드폰을 흔들겠지 갑자기 통보 받은 이별이지만 이제껏 목숨같이 지켜온 자존심 때문에 태연히 그러마 대답하고 커피숍에서 먼저 일어 섰을 때 까지는 몰랐다. 빨갛게 깜빡 거리는 센서가 재빠르게 열어젖힌 문 앞에서 잠시 움찔한 건 다른 것이 아니라 따뜻한 커피숍의 공기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차가운 바깥공기 때문 인줄만 알았었지 뒷모습도 멋지게 뒤도 한번 돌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썰렁한 원룸 침대에 몸을 뉘어 봤건만 그대로 잠드는 것은 무리였다. 혼자서 소주를 두 병이나 ..

창작극장 2005.10.21

나의 왼손

분명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냈는데 아직도 눈 앞은 어둠이었다. 감았던 눈에도 어둠에 익숙해질 몇 초는 필요한 걸까? 머리맡을 더듬어 간신히 건져 올린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자 대낮에는 보이지도 않던 약한 빛이건만 눈이 부셔왔다. 구급차를 부르기엔 너무 낮지만 숙면을 취하기엔 또 너무 높은 열로 온 몸이 덜덜 떨려 왔다. "2시 30분" 덩달아 흔들리는 핸드폰의 액정에서 깜빡 거리는 시계가 자꾸만 촛점이 흐려 지는걸 보면 예사열이 아닌 건가? 덜컥 겁이 났다. 퇴근길부터 으실으실 해오던 몸으론 길 건너 약국이 눈에 띄었지만 15M나 돌아가야 하는 건널목까지 가는 것은 게으른 내게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다. "그때 해열제를 샀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서울로 상경해서 혼자 살아온 지..

창작극장 2005.10.11

Get down on your knees

난 몸을 비틀어 끊어지기 직전까지 그렇게 내 사랑을 짜내지 너를 내 사랑으로 익사 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면 좀 더 쉬웠을까? 얇게 저민 내 속살 아래 퍼렇게 흐르는 정맥과 발갛게 흩어져 있는 실핏줄을 꼼꼼히 꼬아서 만든 새총으로 뾰족하게 얼린 내 사랑을 너의 머리에 쏘았다면 난 조금 쉽게 널 죽일수 있었을까? 내 사랑으로 이제 더 짜낼 사랑은 남아 있질 않는데 내 사랑은 니 목에서 찰랑 찰랑 너를 귀찮게 할 뿐이지 너를 힘들게 할 뿐이야 제발 내 사랑 앞에 무릅을 꿇어줘 그대여 나를 사랑 한다면 난 이제 끊어 지기 직전 더 짜낼 사랑은 없어 당신이 무릎을 꿇어 준다면 내 사랑에 죽을 텐데 당신은 내 사랑에 죽을 텐데.. get down on your knees get down on your knees g..

창작극장 2005.09.23

정신 붙잡기

찬찬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침착하자 침작하자' 를 되뇌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뭔가 집중할것이 필요했다. "야 이 새끼야 정신 놓지 말고 기다려 정신 놓치면 거기서 뒤지는거야 알았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구조대원 대리고 금방 올께" 태식이가 구조대원을 데리러 떠난지 10분전이었나? 30분? 아니면 1분? 알수가 없었다. 객관화 시킬 도구를 잃어 버리고 나면 시간이란건 의식의 속도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떨어지면서 바위에 심하게 부딫힌 왼팔은 조물주가 허용한 각도보다 겨우 15도 정도를 넘어섰을 뿐인데 왼손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낄낄 거리며 평소처럼 오르던 산길이었다. 뭔가 잘못될꺼 같은 어떤 징후도 없었다. 꿈자리는 깔끔했고 오늘 아침도 산을 타기로 한 ..

창작극장 2005.08.09

지식전달 총량 보존의 법칙

전 우주의 에너지는 변화할 뿐이다 소리로 빛으로 하지만 전체 에너지 총량은 항상 동일하다. 물리학에서 말해지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하지만 불변하는것은 에너지뿐만이 아닌것 같다. 전 인류에게 전달되는 지식의 총량도 고대로 부터 지금까지 불변한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에 문자로 기록된 지식에 접근하여 깊이 있는 지식을 쌓은 그들은 인류 전체로 볼때 그야말로 소수의 제한된 인원들이었다. 문자를 해독할수 있고 축적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그렇게 습득한 정보로 대중을 지배해 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어떤가 대부분의 지식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고 인터넷이라는 인프라의 발달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본격화된 지식 공급의 대중화를 비약적으로 발전 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말그대로 정보 과잉의 시..

창작극장 2005.03.25

점심시간 뒷산을 오르다.

이리와 이리로 앉으렴 너와 오붓하게 이야기 하려고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으로 사방을 막았어 보드랍지는 않지만 잔뜩 힘을 주고 싹 튀울 준비를 하고 있는 새순들로 바닦을 깔았지 그렇게 어색하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지 말고 이리와 그냥 털썩 주저 앉는 거야.. 비단처럼 부드럽거나 오리털처럼 푹신하진 않지만 엉덩이를 더럽히거나 하지는 않을테니까 그냥 니 눈을 보고 싶었어 조금 찌프린듯한 니 미간이 보고 싶더라구 셀쭉한 입꼬리도 보고 싶었어 그렇게 정신없이 휙휙 지나처 뛰어 다니니까 제대로 널 볼수가 없더라구 그렇구나 넌 이렇게 생겼었구나 다시 오겠지만 넌 금방 이곳을 떠나겠지 너와 함께 할 그 길지 않은 시간을 나는 또 나대로 이리 저리 분주하게 정신없이 보내느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널 마주 대할..

창작극장 2005.03.23

2년만에.. -19禁-

그 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여기에 온 게 2년 전이었나? 그래 결혼하기 1주일 전 그날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지.. 역시나 금방 들어설 수는 없었다. 핸드백을 양손으로 꽉 잡고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다음에서 문을 밀 수가 있었다. 여전히 잠겨있지 않은 문 2년 만에 처음 방문이지만 역시 그는 그대로였다. 멋지게 웨이브 진 머리칼 세밀하게 새겨진 무늬가 있는 반 무테 안경 너머로 침착한 눈빛과 어색할 만큼 단정하게 구겨진 곳 하나 없는 옷 매무새.. 잊었다고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냄새가 배어있는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그랬지만 애써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mm의 오차도 없이 ..

창작극장 2004.12.31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

혼자 남은 사무실은 적막하고 쓸쓸하기 이를 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김에 스피커 볼륨을 크게 올려서 캐롤을 틀어 놓았지만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기운만 더했다. 취직이라고 해서는 서울 올라와서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달리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개발실에서 숙식하는 처지에 집이라고 들어가 봤자 오늘 같은 날 아무도 없을 건데 제안서나 써 놓자고 기운차게 야근을 시작했지만 제안서는 맴맴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같이 개발실에서 숙식하는 권대리는 오늘 여자친구랑 데이트가 있다면서 하루 종일 들떠 있다가 6시가 되기가 무섭게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조금 들떠 있는 분위기를 틈타 칼 퇴근들을 해 버렸기 때문에 6시부터는 쭈욱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터였다. 전기스토..

창작극장 2004.12.24